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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 2013/12/31 23:59 | sans titre│무제 | 트랙백 | 덧글(0)

여는 글

이상이 내가 이글루라는 생경한 곳에 블로그라는 새 둥지를 튼 이유이다.
나는 이곳에서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지 않다.
(물론 누군가 나의 글에 동의해주고 말을 걸어온다면 고맙긴 할 테지만.)
그저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적어놓는 노트(cahier)이길 바랄 뿐이다.

*좀 더 읽으실 분은 "이어지는 내용"을 클릭하세요.


이어지는 내용

by Paul | 2013/12/31 23:58 | quotidien│일상 | 트랙백 | 덧글(6)

칼 라너, 내 생명의 하느님

내 생명의 하느님

 

칼 라너

최경용, 안중한 옮김

 

나의 하느님, 당신과 대화하고 싶나이다.

사실 내가 당신 말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실상 영원으로부터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던

그 무엇인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진정한 인식과 가장 내밀한 존재이유를

당신의 마음과 생각 속에 갖지 않았던

그 무엇이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녕 내가 입을 열어 말하는 것들이

모두 당신께 관한 이야기들이 아니겠습니까?

 

한편 소심해서 망설여집니다만

내가 당신께 관한 이야기를 당신께 드린다 하더라도

여전히 당신은 게 관한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실상 당신이 하느님이시고

나를 낳아 주시고 거두어 주시는 하느님이시며

나의 기쁨과 소망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즉 내 생명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외에

무슨 이야기를 당신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단순히 내 생명의 하느님이시라기보다

당신은 한없이 가없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내 생명의 하느님이실 따름이라면 참으로 당신을

하느님이시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미흡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탁월한 주권을 생각할 때도,

전혀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여겨질 때도,

내 비록 당신을 생의 여정을 후비고 있는 낮은 골짜기

저 너머 무한히 멀리 계신 분으로 알 때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내 생명의 하느님이시라고

불러 왔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생명이 담은 거룩한 삼위일체 신비를 고백할 때,

그 신비가 당신 무한성의 심연에 영원히 감추어져 있어

우리 스스로 밝혀낼 만한 표지가

피조계에 전혀 없다고 해서

당신을 내 생명의 하느님으로 찬미하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까?

당신의 생명에 대한 신비를 내게 계시해 주셨다고 해서,

은총을 통하여 당신 생명이 내 생명이 되시지 않았던들

내 어찌 이 신비를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당신이 은총으로 내 생명의 삼위일체 하느님이

되어 주시지 않았던들

내 어찌 당신을 성부로,

당신을 성부의 영원한 말씀으로,

당신을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

알아 뵙고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오나 내가 당신을

내 하느님, 내 생명의 하느님이라고 부를 때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당신이야말로 내 생명의 의미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내 떠돌이 인생의 목적지이시며

내 행위를 성별(聖別)해 주시는 분,

내 죄를 심판해 주시는 분,

괴로운 시간에 내게 쓰라림을 주시고

내게 내밀한 기쁨도 주시는 분,

내 자신의 힘이 곧 나약으로 변하는

나의 힘이시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아울러 당신은 창조주이며 나를 보존하시고 용서하시는 분,

내게서 멀리 계시면서 가까이 계시는 분,

불가사의하신 분,

내 형제들의 하느님이시며 내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라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당신께 드려서는 안 될 존칭이라도 달리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 목록을 모두 작성했을 때

나는 무슨 말씀을 당신께 드려야 했겠습니까?

내 존재의 대지에다 보잘것없는 세상에서 배운

모든 언어를 빌어 소리쳐야 했다면

나는 무엇을 당신께 말씀드려야 했겠습니까?

나는 무슨 말로도 당신께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당신께 대해서

또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당신의 영원을 어림잡지 못할진대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의 영원으로써 나를 괴롭히십니까?

당신의 길이란 고작 당신만이 보실 수 있는

당신의 밤이 아닙니까?

그 길이 나를 무시무시한 어두움으로 인도할 따름인데도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의 길을 걸으라고 내게 강요하십니까?

 

우리에게는 다만 유한하고 감촉되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만져집니다.

당신을 무한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데도

당신은 현실적으로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까?

왜 당신은 세례 때 내 영혼에다

당신의 인호를 날인하셨습니까?

왜 내 안에다 신앙의 불을 살라 놓으셨습니까?

이 어둑한 불빛은

오두막의 환한 불빛으로써 안일을 얻으려는 우리가

당신의 밤으로 이끌도록 매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당신은 인간을 위하여

당신과 함께 있으라는 성소를 내게 주셔서

당신의 사제로 만드시며 나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당신 면전에서 숨쉬기를 갈망하도록 하셨습니까?

주님, 저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함부로 판단한다면 용서하십시오)

과연 그들이 당신을 생각이라도 합니까?[

과연 그들에게 당신은 시작이시고 마침이십니까?

당신 없이는 그들의 정신과 마음이

안식을 얻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당신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들이 당신을 찾지 않도록 세상을 고정시켜 놓고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에 지나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당신은 그들의 생명의 하느님이십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주님, 정녕 나의 불평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누가 다른 이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 하느님, 당신만이 다른 이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마음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다른 이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다른 이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 당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겨지지 못하는

숨어계신 하느님,

당신은 내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아서 잘 아시겠지만

때로는 내 마음이 그들과 똑같게 되거나

적어도 비슷하게 되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주님!

내가 입을 열어 당신께 관해서 말씀드려야 할 때

나는 그 얼마나 무력한지요!

내 생명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말고

당신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적절한 칭호가 없어

내 생명의 하느님이라는 칭호를 당신께 드렸을 때

나는 당신께 무슨 말씀을 드린 것이 됩니까?

실상 나는 완전히 실의에 빠져

끊임없이 당신 손아귀에서 벗어나

좀 더 알기 쉬운 지상사물과 영합하려 했습니다.

내 마음은 당신의 신비 속에 에워싸여 있을 때보다도

그런 사물들을 대할 때 훨씬 더 편안해졌습니다.

 

그러하오나 내가 당신 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비록 하찮은 일이라도 내게 정이 든 이 지상생활,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을 맛볼 수 있는 이 지상생활의

좁디좁은 오두막, 나의 진정한 안식처일지라도

당신의 무한하심은 여전히

이 세계를 감싸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세상 저 멀리 당신의 천국 말고 과연 이 세상이

나의 안식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저 많은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 것에 내가 만족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나의 유한성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유한성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이 유한성을 갓 인식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내 유일한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종종 무한히 광대한 우주와 당신의 가없는 생명이

막 태동하는 희미한 지평선을 응시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니 계시면 나는 무기력하고 캄캄한

나의 좁은 세계 속에서 힘없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내 마음이 이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

침묵 가운데 무한하신 당신만이 계시는 고요한 곳으로

계속 솟아오르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결코 이 세상의 쾌락을

일부러 단념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신을 애타게 목말라하는 고통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면전에서 내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으며 미소한

나의 주제넘은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무한에 대한

내 모든 갈망이

정녕 당신께 대한 고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당신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제쳐놓고서

당신께 대해서 내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영원하신 하느님인 당신만이

시간의 제약을 받는 피조물인 내게 살아갈 힘을 주시며

나의 유한성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무한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내가 이 모든 것을 당신께 이야기할 때는

이미 나의 본 이름을 당신께 밝힌 것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다윗의 시편을 기도할 때 계속하여 읊었던

나는 당신의 것’(Tuus sum ego)입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바로 당신께 속해 있는 자입니다.

이 이상 나에 대해서나 당신께 대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 내 생명의 하느님, 내 유한성의 무한하신 하느님이시여!

 

, 하느님, 당신은 나를 얼마나 보잘것없게 창조하셨는지요!

내가 당신과 내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이야말로 내 생명의 영원한 신비시라는 것입니다.

주님, 인간이란 존재는 그 얼마나 복잡다단한 수수께끼인지요!

무릇 인간은 당신께 속해 있는데도

당신은 불가해(不可解)한 분이십니다.

당신 존재 자체가 그렇고 더구나 당신의 독자적인 방식과

판단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를 대하시는 모든 방식이

당신의 자유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시며

이유를 캐묻지 않고 거저 주시는 당신 은총의 선물이라면,

또한 나를 창조하심과 나의 전 삶이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의사에 달려 있다면,

그리고 결국 나의 모든 길이 당신의 길이기에

방황할 수밖에 없다면,

주여, 내가 아무리 캐물어도 당신의 깊이를

도시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내가 당신과 얼굴을 맞대고 대면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불가해한 분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불가해한 분이 아니시라면

당신은 오히려 나보다도 못한 분이십니다.

내 정신이 당신을 포착하고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께 속하지 않고 도리어 당신이

내게 속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만 얽매여 있다면

참으로 그것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것은 내 유한성의 한정된 좁다란 감옥 속에서

영겁(永劫)이 흐르도록

그 안에서만 오락가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주받은 자의 운명일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당신의 나의 진정한 안식처가 되실 수 있습니까?

당신은 내가 갇혀있는 좁고 작은 지상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실 분이십니까?

아니면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넓고 끝없는 당신의 초원으로

나를 꾀어내심으로써 도리어 내 생명에

또 다른 쓰라림이나 더해주시는 분이십니까?

내가 기껏 안다는 것이 고작 당신의 불가해성이라면

내 자신의 크나큰 불만은 바로 당신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영혼에게

한갓 끊임없는 불안만을 안겨주시는 분이십니까?

내 모든 질문이 도무지 대답하지 않으시는 당신 앞에서는

벙어리가 되어야만 합니까?

당신을 알고자 하는 나의 불타는 원의를 깡그리 뭉개버리면서

대답하시는 것이 고작 알았다는 식의 묵묵부답입니까?

 

하오나 나는 바보처럼 지껄이고 있습니다.

, 하느님,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성자를 통하여

내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을 사랑하라고 내게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의 계명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의향에 반대되는

의무를 지우기 때문에 때로는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지만 사실은 일찍이

내가 조금도 맘먹지 않았던 것을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라는 것,

당신과 친밀히 지내야 된다는 것,

당신의 참 생명을 사랑하라는 것들입니다.

당신은 나를 당신 성심에로 이끌어 주실 것을 아시면서도

당신과 더불어 친숙한 밀어를 속삭일 수 있고

내 생명의 불가해한 신비를 이야기할 수 있는 당신께만

몰두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말씀드릴 수 있음을

바로 당신이야말로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하느님, 오직 사랑 안에서만 당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내 영혼의 문이 활짝 열려

내게 자유의 새 공기를 마시게 해주시며

하찮은 자아를 잊어버리게 해주십니다.

사랑 안에서 내 전 존재는

궁핍과 공허의 포로로 만드는 나의 편협과

자아긍정의 완고한 한계를 벗어나 여울져 흐릅니다.

사랑 안에서 내 영혼의 모든 능력은

당신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그 능력은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고

오로지 당신 속에 완전히 흡수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당신은 내 마음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계시며,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도

더 한층 당신은 나와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오나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자아의 좁을 세계를 깨뜨리고

또한 의문에 해답을 얻지 못하는

끊임없는 괴로움을 남겨놓고 떠날 때,

내 눈먼 두 눈을 가지고 가까이할 수 없는 당신의 광휘를

단지 멀리서나 바깥에서만 바라보지 않을 때,

더구나 오, 불가해하신 분이시여!

당신이 사랑을 통해서 내 생명의 핵심이 되어 주실 때

, 신비로운 하느님이시여,

나는 당신께만 내 자신을 소진(蘇秦)할 수 있으며

내가 품은 모든 의문도 불살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소유하고자 할 뿐

무엇을 더 탐내시겠습니까?

사랑은 당신이 당신 자신이기를 바랄 뿐

거울 속에 나타난 당신의 영상(影像)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로지 당신과 하나 되기만을 바라기에

자아를 소유하기를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의 영상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원합니다.

마치 사랑은 그 자체가 올바르고 선하기에

더 이상의 변명이 필요치 않듯이

당신 역시 사랑으로 인해 올바르고 선하십니다.

사랑은 왜 당신이신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당신을 모셔드립니다.

알았다고 하시는 당신의 대답은 사랑의 더 없는 기쁨입니다.

이렇게 기쁜 상태에서 내 마음은

더 이상 당신에게서 당신의 영원한 비밀을 캐내려고,

애써 당신을 사랑의 차원에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나를 붙들고 당신의 차원에로 끌어올려

당신과 만나게 해줍니다.

 

사랑 안에서 내 자신을 포기할 때

당신은 나의 참 생명이 되시고

당신의 불가해성은 사랑의 단일성 속에 융합되어 버립니다.

내가 마음을 허락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될 때

당신의 참된 신비를 포착하는 그것이

바로 내 행복의 근원이 됩니다.

당신의 무한성이 보잘것없는 내 허무에서 더 멀어진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데 더 큰 부담이 됩니다.

내 빈약한 실존이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완전히 의탁하면 할수록

내 전존재는 가장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신 당신께

무조건 복종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당신의 길과 판단에 대한 불가해성이 벗겨지면 질수록

당신께 대한 내 사랑의 열성도

그만큼 커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내 사랑이 점점 심화되어 축복을 받게 되면

내 가난한 영()은 당신을 이해하기에

더욱 난감해질 것입니다.

 

불가해하신 분, 내 생명의 하느님이시며, 내 생명이 되소서.

당신의 어둠 속으로 인도하시는 내 신앙의 하느님,

당신 어두움을 내 생명의 화사한 빛으로 바꾸어 주시는

내 사랑의 하느님이시여,

이젠 내 희망의 하느님이 되소서.

그러면 당신은 언젠가 내 생명의 하느님이 되실 것이며

영원한 사랑의 생명이 되실 것입니다.

by Paul | 2013/08/30 21:09 | marié│신랑 | 트랙백 | 덧글(0)

지구 여행기_ 영국의 제주올레, 보드라운 초록의 길

지구 여행기

영국의 제주올레, 보드라운 초록의 길

시사INLive | 정지혜 | 입력 2012.10.0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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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슬리(Dursley) 마을 스틴치콤 언덕(Stinchcombe Hill). 런던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인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런던과 달리 고요하고 평화로운, 그야말로 동화책 속의 작은 시골마을 같은 그곳에 제주올레를 품은 코츠월드웨이(Cotswold Way)가 기다리고 있다.

'제주올레-코츠월드웨이 우정의 길'은 작고 평화로운 시골마을, 더슬리에서 시작해 스틴치콤 언덕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5.5㎞의 순환형 트레일 코스다. 초반의 언덕길을 제외하면 큰 경사가 없고 대부분 완만한 길이어서 제주올레 길을 걷듯 놀멍 쉬멍 걸어 2시간30분이면 가뿐히 완주할 수 있는 난이도 중하의 걷기 편한 길이다. 편한 길은 심심하고 재미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 나도 궁금했다. 총길이 5.5㎞, 소요 시간 2시간30분, 난이도 중하로 소개되는 영국 코츠월드웨이에서 제주올레와의 우정의 길을 위해 새로이 찾아낸 이 길이 과연 어떤 풍경을,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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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과 도로를 가르는 키싱게이트. 사유지 주인이 트레일을 관리한다.

제주올레와 '우정의 길', 풍경도 비슷

길의 시작은 더슬리 마을 도서관 인근이다. 코스 초반에 오르막길이 있다 하여 내심 긴장하며 힘차게 발을 떼지만 불과 몇m 앞에 더슬리 마을에서 최고로 맛 좋은 맥주를 만든다는 자그마한 영국식 선술집(Pub) 앞에서 발걸음은 벌써 느려지기 시작한다. 무거운 발은 길을 따라 움직이지만 마음은 계속 제자리…. 그러나 2시간20분 후를 기약한다.

긴장하며 걷는 오르막길은 걱정했던 만큼 고되지는 않다. 200m도 채 되지 않는 데다, 목장과 도로를 가르는 키싱게이트(kissing gate)를 지나는 소소한 재미도 있다. 영국은 트레일(Trail:산길, 오솔길, 시골길)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정부 차원의 탄탄한 백그라운드를 자랑한다. 특히 트레일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한 법안이 오래전부터 마련되어 있어서 다른 나라의 트레일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법안에 따르면 국립 트레일로 지정된 길이 사유지를 지날 경우 사유지 주인은 트레일을 유지·보수·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사유지로 길을 낼 때 특히 조심스러운 우리네 사정에 빗대보면 참으로 대단하다.

오르막 끝, 드디어 스틴치콤 언덕의 정상에 선다. 스틴치콤 언덕 주변은 골프장이 조성되어 있다. 편안한 차림으로 집 앞 산책 나오듯 골프장에 소풍 나온 가족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에버그린의 나라 영국과 사철 푸름을 간직한 제주도에서만 가능한 이 보드라운 초록의 여유로움이란…. 우정의 길을 내는 데 이 골프장의 협조가 참으로 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 있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무실과 주차장 사잇길을 지나 드디어 흙길을 밟는다. 폭신한 흙과 잔디를 사뿐사뿐 밟고 지나는 걸음이 너무도 상쾌해 포장된 오르막길을 올라오며 후끈 달아오른 발이 금세 가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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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츠월드웨이는 초반의 언덕길을 제외하면 큰 경사가 없다. 푹신한 잔디와 흙이 깔려 있다.

골프장 사무실을 지나고부터는 길이 잔디에 덮여 보이지 않기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도 하니 길 표식을 잘 확인하며 걸어야 한다. 제주올레-코츠월드웨이 우정의 길 표식은 코츠월드웨이 길 표식에 제주올레의 상징인 간세 모양(조랑말)이 더해진 데다, 진초록으로 색상이 지정되어 있어서 어디서든 눈에 잘 띈다. 길 표식을 좇아 흙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외마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그야말로 숨이 멎을 듯한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제주올레 1코스 알오름에서 내려다본 시흥리마을과 우도, 바다 풍경에 3코스 통오름의 평화로운 아기자기함, 바다목장의 상쾌하고 장엄한 느낌을 더해놓은 듯한 그 풍경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영국의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갈 때, 감동은 절정에 달한다.

발 아래 마을 풍경은 조각보 같아

봄에는 영국도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형광노랑 유채꽃이 때로는 군락으로, 때로는 오순도순 작은 무리로 맑게 흔들리며 길 곁에 이어져 여행자를 반갑게 맞는다. 4~5월이 제철인 블루벨도 발아래 한가득이다.

이즈음에서 주변 풍경에 넋을 잃고 두리번거리다보면 자연의 색 가운에 유독 눈에 띄는 파란 색깔의 귀여운 녀석이 떡하니 앞에 놓여 있다. 바로 간세 인형이다. 우정의 길 중간 지점인 이곳에 제주올레의 상징물이자 길 표식인 간세가 있다. 우정의 길에 대한 설명을 안장에 업고 늠름한 자태로 진행 방향을 가리키고 서 있는 녀석을 발견했을 때의 감동은 풍경에서 받은 감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과 간세를 마음에 담고 조금 더 걷다보면 이 길을 찾아낸 코츠월드웨이 보호위원회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는 '최고의 뷰포인트'가 나온다. 진행 방향을 일러주는 길 표식 외에 다른 안내 표식이 전혀 없는 코츠월드웨이에서는 뷰포인트도 따로 표시가 되어 있거나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직접 그 길 위에 서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디가 뷰포인트인지, 왜 그러한지. 백 마디 설명 따위 단번에 사족으로 만들어버리는, 마음에 와 닿는 풍경이랄까…. 물론 코츠월드웨이 가이드북과 홈페이지에는 뷰포인트가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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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 스틴치콤 언덕 정상에 서면 숲의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 풍경을 굽어보며 촉촉한 영국의 바람을 맞는 기분이 상쾌하다.

영국은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영국에도 화창한 날이 많다. 영국인들 스스로도 놀라고 즐거워하는 이상기후. 그럼에도 영국에서 맞는 비는 자연스럽다. 비 내리는 날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 참 좋을 듯한, 돌로 지어진 오두막 쉼터를 지난다. 이 석조 오두막 쉼터는 스틴치콤 언덕을 개발사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주변의 땅을 매입하고 지금껏 관리해오고 있는 스틴치콤 힐 트러스트(Stinchcombe Hill Trust)에서 지어 관리하는 곳이다. 세계 여러 트레일의 조성 목적과 그 역사를 들여다보면 개발사업에 맞서 자연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트레일을 개발하고 조성한 사례가 많이 보이는데, 코츠월드웨이도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초록의 길은 다시 골프장 주차장 곁에서 이어지고 만난다.

코츠월드웨이 보호위원회는 정규 트레일 코스에서 뻗어 나온 사이드 트레일을 우정의 길을 위해 새로이 개발했고, 제주올레는 중산간의 고즈넉함과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품은 제주올레 3코스를 우정의 길로 정했다. 이 길을 찾아내면서 코츠월드웨이 보호위원회 제임스 블로클리 국립 트레일 매니저는 '쌍둥이 트레일'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는데, 직접 그 길 위에 서보니 그 표현이 충분히 이해된다. 사철 초록을 볼 수 있는 에버그린의 싱그러움과 조각보를 이어놓은 듯한 발아래 마을 풍경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제주올레 3코스와 꼭 닮아 당장 제주의 바다 내음을 품은 바람이 슁~ 하고 지나갈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코츠월드웨이를 끼고 이어지는 마을들은 참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더슬리 마을도 그렇지만 동화 속에서 막 꺼내놓은 듯한,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코츠월드웨이에 발걸음하는 이들은 길을 걸을 때만큼이나 느린 걸음으로 마을을 둘러보며 놀멍 쉬멍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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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 트레킹 도중 비가 오면 오두막 쉼터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아담한 돌집이 여행자를 부른다.

걷기를 마치며 시원한 맥주 한잔

코츠월드웨이 주변의 작고 아담한 영국식 집의 외벽은 보통 라임스톤이라고 하는 석회석이 주재료인 경우가 많다. 코츠월드웨이를 걷다보면 제주도에서처럼 돌담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이때 사용되는 돌 역시 석회석인 경우가 많다. 주변의 자연자원을 주재료로 사용한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는 그곳의 돌담 풍경은 아기자기한 마을과 하모니를 이루어, 여행이 끝난 이후에도 잔잔한 감동으로 눈 안에,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더슬리 마을로 돌아내려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 조심 또 조심. 시작하는 길에 눈과 마음에 담아두었던 선술집에 들러 시원하고 달큰한 맥주 한잔을 들이켜고는 생각한다. '천국은 멀리 있지 않아.' 분명히 그렇다. 제주올레를 걸으며 행복과 평화, 치유를 경험한 이들은 걷기에 중독되어, 제주올레에 중독되어 계속해서 다른 걷기 좋은 길을 찾아 나선다. 제주올레만 한 길이 없다? 해외에 나가서도 제주올레 길을 걷고 싶다? 영국 코츠월드웨이에 제주올레를 품은 오소록한 그 길이 있다.

정지혜/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막내에서 대외협력팀장으로 쾌속 승진한 제주올레의 마스코트. 팀장이지만 팀원은 없고 대외협력 업무와 언론 홍보까지 맡아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휴가 때마다 해외 트레일을 찾아 염탐하고 온다.

코츠월드웨이 가는 길

코츠월드웨이는 영국의 15개 내셔널 트레일의 하나로, 북쪽의 치핑캠프던(Chipping Campden) 타운에서부터 남쪽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인 바스(Bath)에 이르는 162㎞의 길이다. 이 길은 런던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중세 유럽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30년 넘게 세계 도보여행자들에게 사랑받아왔다. 특히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바스는 15세기 바스 수도원(Bath Abbey)을 비롯해 유럽 최고의 역사적·건축학적 의미가 있는 보물이 가득하다. 2000년 전 로마인이 만들어놓았다는 온천도 아주 유명하니, 여정의 끝에 바스를 방문해 고단한 발을 쉬게 해주는 것도 좋다.

버스 또는 기차역(캠앤드더슬리 역 Cam and Dursley Station)에서 시종점인 더슬리 마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인터넷(www.traveline.org.uk) 또는 전화(0871-200-2233)로 교통편을 예매할 수 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경우, 런던패딩턴(London Paddington) 역에서 출발, 브리스톨파크웨이(Bristol Parkway) 역에서 한 번 갈아탄다. 캠앤드더슬리 역까지 2시간 정도 소요되고 요금은 왕복 49파운드 정도. 환승이 한 번 있지만 차표는 런던패딩턴에서 캠앤드더슬리까지 하나만 사면 된다. 기차표 예매는 http://www.nationalrail.co.uk에서.

더슬리 마을은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다. 마을 내에 식사와 음료가 모두 가능한 훌륭한 맛집이 여럿 있다. 길 중간에는 상점이 없으니 간단한 스낵과 음료를 이곳에서 미리 준비해가면 좋다.

먹을 곳으로는 스틴치콤 언덕 위 우정의 길 곁에 매우 고풍스러운 B & B를 강력 추천한다! 자녀들이 외지로 나가 부부 내외만 살고 있다. 우정의 길이 열리면서 코츠월드웨이 보호위원회의 권유로 B & B를 시작했다. 제주올레의 할망숙소와 비슷한 개념이나 할머니는 아니고 매우 우아한 주인아주머니가 계신다. 영국식 아침식사가 제공된다. 오래전 영국의 성주들의 아침상이 꼭 그랬을 것만 같다. 포크를 집는 손길이 나도 모르게 우아해지리라.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내주는 향기로운 홍차와 고소한 쿠키는 구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보너스! 사전 예약 필수! 트윈 70파운드(약 10만8660원), 싱글 50파운드(약 9만550원)이다(아침 포함).

참고:코츠월드웨이 홈페이지(http://www.nationaltrail.co.uk/Cotswold/)

정지혜 (제주올레 대외협력팀장) /

by Paul | 2012/10/06 23:37 | 트랙백 | 덧글(0)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표상을 이용한 교리교수 연구

2011학년도 2학기

학문방법론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표상 연구

: C. S. 루이스의 『나르니아 연대기』를 중심으로


(A) Study on Christian Symbols in Literature

: Focusing on The Chronicles of Narnia by C. S. Lewis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  학  과


200911032 이  종  원

1.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신화인 동시에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강생은 ‘완전한 신화인 동시에 완전한 사실’이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다른 신화들과는 달리 실제로 일어난 진실한 신화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분명 본시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신화이다.1) 그렇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의 경우 그리스도교 문화, 특히 성경의 표징이나 모티프를 이용한 작품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된 사상으로 자리잡고 ‘이성중심주의’에서 ‘감성적 경험중심주의’로, ‘자율성중심주의’에서 ‘자기중심주의’로, ‘지식-원리중심주의’에서 ‘다원주의-상대주의’로 가치관이 변화하면서2) 그리스도교의 진리성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공격해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성경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C. S. 루이스(C. S. Lewis)의 『나르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를 통하여 인류의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과 선과 악의 세계, 그리고 과학과 이성에 대한 불안과 한계를 느끼는 현대인들이 열망하는 초월적인 세계인 ‘나르니아’를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하여 성경적 함의와 상징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2. C. S. 루이스의 생애와 저작


 2.1. C. S. 루이스의 생애


  C. S. 루이스는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공부했고, 또한 그곳에서 약 30년간 영문학을 강의했다. 말년에는 케임브리지에서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루이스는 ‘회의론자들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신화를 주제로 J. R. R. 톨킨(J. R. R. Tolkien)과 대화를 나누면서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톨킨은 신화와 그리스도교 복음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루이스를 그리스도교 신자로 인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2.2. C. S. Lewis의 저작


  영문학 연구에 큰 기여를 한 학자였던 루이스는 『나르니아 연대기』, 『침묵의 별 탈주』(Out of the Silent Planet)를 비롯한 우주 소설 3부작 등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판타지와 과학소설(SF)을 쓴 작가였으며,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스크루테이프 편지』(The Screwtape Letters) 등의 그리스도교 변증서를 집필하였다.

  특히 루이스는 톨킨과 함께 판타지 문학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데, 따라서 판타지 문학에는 이 두 사람이 정립한 몇 가지 관습이 존재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험을 떠나다’로 시작해 ‘집으로 돌아오다’로 귀결되며 『나르니아 연대기』의 ‘나르니아 왕국’ 혹은 『반지의 제왕』의 ‘중간계’처럼 인간들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영역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기저에 깔고 있다. 또한 신화적 영역의 존재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갖가지 마법들이 텍스트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세계관의 기본 질서는, 앞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로 명료하게 정리된다.


3. C. S. Lewis의 『나르니아 연대기』와 그리스도교적 표상


 3.1. 『나르니아 연대기』


  『나르니아 연대기』는 「마법사의 조카」(The Magician’s Nephew),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말하는 말과 소년」(The Horse and His Boy), 「카스피안 왕자」(Prince Caspian), 「동녘호의 모험」(The Voyage of the Dawn Treader), 「은의자」(The Silver Chair), 「최후의 대결」(The Last Battle) 등 7권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4) 각각의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동일한 인물이 여러 작품에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연대기’라는 단어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나르니아 연대기』는 나르니아 왕국이 창조되고 종말에 이르는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책은 바로 이 기간에 있었던 일들의 기록이다.


 3.2. 『나르니아 연대기』에 드러난 그리스도교적 특성


  루이스는 톨킨의 말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진정한 신화임을, 다시 말해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신화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신화라고 이해했다. 이로써 루이스는 이교 신화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이해함과 동시에, 비인격적인 하느님을 믿는 데서 강생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옮겨갔다.5) 이렇듯 판타지 문학의 선구자격이자 바이블로 일컬어지는 『나르니아 연대기』는 공교롭게도 판타지와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나르니아 연대기』는 노골적인 종교적 함의로 넘쳐나고 있다. 판타지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선과 악의 대결을 통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전통에 따른 영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교리에 근간을 둔 이런 식의 대결구도는 ‘악은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설파하며,6) 나르니아와 같이 실존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강력한 믿음은 사후 세계와 신의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특히 판타지 문학 속에서 고난을 받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승리하는 영웅의 존재는 필연적인데, 이는 예수에 대한 강력한 은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3.3. 『나르니아 연대기』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표상


  3.3.1.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표상

  루이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성경적 은유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중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무엇보다도 사자 아슬란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7) 이 작품은 디고리 커크라는 노교수의 집에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커크 교수의 집에 있는 옷장을 통해 나르니아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나르니아는 흰 마녀의 통치 아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8) 말하는 동물들은 아담의 아들과 하와의 딸9)에 관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예언이 성취되어 아슬란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네 아이들이 나르니아로 온 것은 바로 이 예언을 따른 것이었고, 곧이어 아슬란이 돌아와 마녀와 전투가 벌어져 나르니아에 평화가 돌아오는 듯이 보였지만 흰 마녀의 주문에 걸려들어 자신의 자만심과 이기심, 욕심과 욕망에 져서 배신자가 된 에드먼드를 구하기 위해 아슬란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던 그 때, 아슬란의 태초 이전부터 내려오는 더욱 강한 마법에 따라 부활하고, 전쟁은 아슬란이 이끄는 나르니아 군대의 승리로 끝난다. 이후 나르니아는 캐프 바라벨 성에 있는 네 개의 왕좌를 차지한 네 아이들의 통치를 받으며 번영을 누리고, 어느 날 아이들은 홀연히 사라져 우리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아슬란이 아담의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결심한 후 보여주는 일련의 모습들은 예수가 붙잡혔던 날 밤,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까지의 성경 속 서술을 거의 정확하게 되풀이해낸다.10)

  특히 부활에 대한 부분은 장소에 관련한 세심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복제’하고 나선다. 수잔과 루시는 마녀의 칼에 목숨을 잃은 아슬람의 시신이 있는 바위 탁자로 간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슬란은 그곳에 없었다. 아이들은 울부짖는다. “누가 그랬을까? 어떻게 된 셈이지? 또 다른 마법일까”11) 그 때 등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또 다른 마법이란다!”12) 아슬란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아슬란은 태초의 심오한 마법보다 더욱 심오한 태초 이전의 마법에 대하여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준다.

“마녀는 강한 마법을 알고 있지만, 실은 마녀가 모르는 더욱 강한 마법이 있단다. 마녀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태초까지밖에는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마녀가 태초 이전의 정적과 어둠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그곳에는 다른 마법의 주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배신 행위를 범하지 않은 자가 배신자를 대신하여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의 제물로 바칠 경우에는, 바위 탁자가 깨어지고 죽음 자체가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희생자는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마녀는 모르고 있단다.”1)


  이렇듯 부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예수를 따르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십자가에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고(요한 19,38-42), 아슬란이 죽어 있는 바위 탁자로 가는 수잔과 루시처럼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사서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해가 뜨자 무덤으로 가는 장면(마르 16,1-2)과, 없어진 아슬란의 시신을 보고 울부짖는 아이들처럼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울면서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다 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 서계셨다(요한 20,10-16)는 성경 속의 은유를 찾아 볼 수 있다.13) 이 외에도 에드먼드의 행동은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를 연상시키며, 아슬란의 최후와 부활을 함께하는 수잔과 루시는 종종 막달라 마리아처럼 비쳐진다.


  3.3.2. 「카스피안 왕자」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표상

  「카스피안 왕자」또한 다양한 성경적 상징과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나르니아가 텔마인들에게 지배받고 있던 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텔마인들은 우리 세계 해적들의 후손으로, 나르니아를 지배한 후 말하는 동물들을 쫓아내고 옛 나르니아의 역사를 신화나 전설 속의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들의 눈을 피해 숲속 깊숙한 곳에서 숨어 지내는 옛 나르니아의 백성들은 예언에 있는 대로 나르니아에 번영을 가져왔던 네 왕이 귀환하여 나르니아를 평화롭고 행복 가득한 나라로 되돌려 줄 것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옛 나르니아의 백성들 가운데 배신자가 생겨나고, 아슬란에 대한 믿음 역시 점점 퇴색되어 간다. 바로 이때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나르니아로 오게 된다. 이제 텔마인들과 옛 나르니아 백성들 간에 전투가 벌어진다. 미라즈 왕의 조카인 카스피안 왕자도 나르니아 편에 서게 되는데, 옛 나르니아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미라즈 왕에게 아들이 생기면서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터였다. 전쟁은 나르니아의 승리로 끝나고 옛 나르니아의 백성은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와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이야기 역시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의 억압과 구원의 경험과 구약과 신약 사이에 거의 400여 년간의 하느님의 침묵과 메시아의 기다림, 초대교회의 시기에 박해받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연상시킨다.14)

  이러한 모습은 구약의 2역대 34장의 유다의 어린 왕 요시야와 작품 속의 카스피안 왕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시야는 조상들의 사악함과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유다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에만 전념한다.15) 요시야 왕은 어린 나이에 하느님을 찾기 시작한다. 요시야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따라 걸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통치 제팔년에, 그는 아직 어린 몸으로 조상 다윗의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였다. 또 제십이년에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과 조각 신상과 주조신상들을 치우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하기 시작하였다”(2역대 34,2-3). 요시야 왕은 성전을 수리하고 제사장들의 직위를 회복시키며 율법서를 다시 발견한다. 또 33절에서 “요시야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속한 모든 지역에서 역겨운 것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 저희 하느님을 섬기게 하였다. 그래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사람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따르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카스피안 왕자가 나르니아를 회복시키려면 먼저 왕위를 빼앗은 악한 삼촌 미라즈 왕과 싸워야 한다. 카스피안은 나르니아 국민들을 한데 모아 텔마 군대를 격퇴하기 위해 머리를 짜낸다. 하지만 텔마 군대에 비해 수적으로 너무 열세라는 것을 깨달은 카스피안은 수잔 여왕의 뿔나팔을 불어 도움을 요청한다. 이로 인해 곧 페번시가의 아이들과 아슬란이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나르니아에 나타난다.16)

  로마 5,3-5의 내용처럼 피터, 에드먼드, 수잔, 루시는 나르니아에서 두 번째 모험을 하며 용기를 기르게 된다. 루시는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알게 되며(마태 16,24), 루시와 수잔의 모습은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를 연상시킨다(루카 10,38-42). 즉 루시가 아슬란의 발치에서 그의 말을 듣는 반면 수잔은 이것저것 염려하느라 정작 아슬란과는 시간을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카스피안 왕자」에는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라든지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라는 구절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3.3.3. 그 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표상

  루이스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마법사의 조카」는 창조와 악의 기원을,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그리고 있으며, 연대기의 마지막 작품인 「최후의 대결」은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세상의 종말, 마지막 심판을 드러내고 있다.


4. 나가는 말


  성경은 단순히 신학적인 명제나 교리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지와 이야기가 가득 담긴 책이다. 하느님은 이미지와 이야기 양식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영국의 판타지 작가인 존 호우튼(John Houghton)은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이유 중 많은 경우가 이야기하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 기인”17)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활용하여 그리스도교를 소개하고 변증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가장 좋은 예를 루이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루이스는 관념을 난삽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이미지와 예화를 적절히 사용하여 쉽고 담백하면서도 동시에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표현하면서 판타지와 같이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양식이 영적 실재를 다루는 데 적합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현대 판타지 문학의 규범적 작가인 톨킨은 경험적 세계를 제1세계(primary world)와 이야기꾼이 만든 제2세계(secondary world)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야기꾼에 의해 창조된 제2세계는 경험적 세계의 질서가 아닌 작품 내적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톨킨은 제2세계는 독자에게 ‘압도적 기이함’의 느낌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하며, 제1세계의 낡은 실존에서 ‘탈출’하고 감춰져 있던 진실 혹은 리얼리티를 통해 ‘위안’을 체험하고 경험적 삶의 신선함을 회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8)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오직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가 영화, 게임, 드라마에 넘쳐나면서 하느님 나라와 같은 영적 실재와의 연관성은 점점 줄어드는 현실 속에 살고 있기에, 그리스도인이라도 상상의 세계에 관해 말하는 것을 낯설어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 루이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나르니아 연대기』를 통하여 영적 세계의 한 실체로서 하느님 나라를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나르니아로 설명되는 상상의 세계도 다른 허구적 상상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비실재라고 인식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르니아를 통해 우리 사회 속에 하느님 나라를 새로이 설명해 나갈 힘을 살려가야 한다.


























▪참  고  문  헌▪


1. 성경

『성경』,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05


2. 단행본

David C. Downing, The Most Reluctant Convert: C. S. Lewis's Journey to Faith,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2

Ditchfield, Christin(크리스틴 디치필드), 『나니아 연대기가 읽어주는 성경: C. S. 루이스의 원작 소설에 숨겨진 성경 이야기』, 김의경 옮김, 서울: 크림슨, 2005

Ford, Paul F., Companion to Narnia, New York, NY: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31986

Lewis, C. S.(C. S. 루이스), 『시편 사색』, 이종태 옮김, 서울: 홍성사, 2004

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자와 마녀와 옷장」, 『나르니아 연대기』, 전경자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1

_________________________, 「카스피안 왕자」, 『나르니아 연대기』, 전경자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8

Lindskoog, Kathryn Ann(캐스린 린즈쿡), 『나니아 연대기의 거의 모든 것=Narnia: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만나는 C. S. 루이스의 세계』, 김의경 옮김, 서울: 크림슨, 2005

Houghton John(존 호우튼), 『해리포터를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송태현 옮김, 서울: 라이트하우스, 2004

Tolkien, J. R. R., The Tolkien Reader, New York, NY: Ballantine Book, 1966, p. 37

김도일·장신근, 『기독교 영성 교육』, 서울: 도서출판동연, 2009


3. 정기간행물

황치복, 「판타지 문학의 성서적 함의와 풍유: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문학과 종교』 제13권 제3호(2008), 한국문학과종교학회


4. 학위논문

백보람, 『C. S. 루이스의 영성에 근거한 기독교 교육의 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1


1) C. S. Lewis(C. S. 루이스), 『시편 사색』, 이종태 옮김, 서울: 홍성사, 2004, 151쪽.

2) 김도일·장신근, 『기독교 영성 교육』, 서울: 도서출판동연, 2009, 26-30쪽.

3) David C. Downing, The Most Reluctant Convert: C. S. Lewis's Journey to Faith,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2, pp. 13-18.

4) 시리즈 중에서「사자와 마녀와 옷장」이 제일 먼저 집필·출판되었지만, 완결된 뒤 사건 전개에 따른 시간순으로 재배열하여 지금의 순서로 읽히고 있다.(참조: Paul F. Ford, Companion to Narnia, New York, NY: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31986, p. 451)

5) 백보람, 『C. S. 루이스의 영성에 근거한 기독교 교육의 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1, 44쪽.

6) 황치복, 「판타지 문학의 성서적 함의와 풍유: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문학과 종교』 제13권 제3호(2008), 한국문학과종교학회, 7쪽.

7) Kathryn Ann Lindskoog(캐스린 린즈쿡), 『나니아 연대기의 거의 모든 것=Narnia: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만나는 C. S. 루이스의 세계』, 김의경 옮김, 서울: 크림슨, 2005, 42쪽.

8) 황치복, 앞의 책, 9쪽.

9) 루이스는 작품 속에서 인간이라는 말을 ‘아담의 아들, 하와의 딸(son of Adam, daughter of Eve)’이라는 표현과 교차 사용하고 있다. 아슬란은 이 표현을 네 아이들을 지칭할 때에만 사용한다(참조: Ford, Paul F., op.cit., p. 388).

10) Christin Ditchfield(크리스틴 디치필드), 『나니아 연대기가 읽어주는 성경: C. S. 루이스의 원작 소설에 숨겨진 성경 이야기』, 김의경 옮김, 서울: 크림슨, 2005. 63쪽.

11) C. S. Lewis, 「사자와 마녀와 옷장」, 『나르니아 연대기』, 전경자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1, 132쪽.

12) 같은 책, 132쪽.

13) Christin Ditchfield, 앞의 책, 97쪽.

14) 같은 책, 149쪽.

15) 황치복, 앞의 책, 12쪽.

16) C. S. Lewis(C. S. 루이스), 「카스피안 왕자」, 『나르니아 연대기』, 전경자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8, 88-96쪽.

17) John Houghton(존 호우튼), 『해리포터를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송태현 옮김, 서울: 라이트하우스, 2004, 64쪽.

18) J. R. R. Tolkien, The Tolkien Reader, New York, NY: Ballantine Book, 1966, p. 37


by Paul | 2011/12/03 10:26 | marié│신랑 | 트랙백 | 덧글(0)

지요하, 「어머니 이 나라가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2011. 06. 11.

"어머니, 이 나라가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시대를 고민하며 <성모의 밤>에 시를 읊다
2011년 06월 01일 (수) 20:00:34지요하  jiyoha@naver.com

어느덧 5월이 가버렸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5월 캘린더를 떼어내면서 이상한 ‘이별 체감’ 같은 것을 맛보았습니다. 6월 캘린더를 보면서는 30일 후에는 2011년도 절반이 꺾어지겠구나! 공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의 빠름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서 위안도 얻게 되니,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말해 요즘은 내 나이와 상관없이 세월의 걸음을 재촉하는 심정입니다. 

이제 633일 남았나요. 카운트다운이 진행 중인데요, MB의 잔여 임기를 초 단위까지 알려주는 시계화면을 보노라면 참 흥미롭습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초침이, 숫자들의 율동이 마치 힘찬 군무(群舞)처럼 보이기도 하고, 내 심장 박동과 호흡을 잘 이끌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 대성당 앞 마당에 모여 성모상 앞에서의 예절을 마치고 성당 입장을 기다리는 신자들. (사진/지요하)

천주교 신자인 제가 적을 두고 있는 대전교구 태안성당에서는 어제(5월 31일) 저녁 ‘성모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전 세계 모든 가톨릭 성당들이 5월 중에 ‘성모의 밤’ 행사를 갖는데, 5월 마지막 날에 행사를 갖는 성당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 태안성당도 올해는 5월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날 밤에 행사를 가졌는데, 지난해는 29일(토) 저녁에 행사가 있었습니다. 같은 날 공주 공산성 안의 불교사찰 영은사에서는 4대종단(천주교‧불교‧원불교‧개신교)과 대전충남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하는 4대강 공사 저지를 위한 ‘금강 지키기’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심을 해야 했지요. 고심 끝에, 성당 ‘성모의 밤’ 행사는 해마다 갖는 행사이고, 공주 공산성 영은사 ‘금강 지키기’ 행사는 너무도 절박한 일이라서 결국 아내와 함께 공주행을 단행했지요. 

우리 본당에는 또 한 분의 시인이 계신데요. 그 시인이 지난해 ‘성모의 밤’ 헌시 낭송을 담당하게 돼서, 저는 좀 더 수월하게 공주 영은사 행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성모의 밤’ 헌시 낭송이 제 담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시인과 제가 우리 본당 ‘성모의 밤’ 헌시 낭송을 겨끔내기로 담당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성모의 밤’ 헌시를 또 한 편 짓게 되었습니다. 

조금 섭섭한 일도 있었습니다. 내게 ‘성모의 밤’ 헌시를 부탁하신 본당 사목협의회의 간부 되는 분이 재미있는 말씀을 했습니다. 주임신부님의 강론이 너무 길어서 신자들이 ‘성모의 밤’ 행사를 전체적으로 지루해할 수도 있으니 헌시를 짧게 지어달라는 부탁이었지요. A4 용지 1/2 정도로 지어달라는, 분량 제시까지 하더군요. 

편지 형식의 산문을 짓는 것도 아니고 운문을 짓는 것인데 A4 용지 2/1 정도라니 어이없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운문에 대한 무지의 일단이기도 할 것 같고, 헌시 낭송을 요식의 하나로만 간주하는 태도일 것도 같고…. 

  
▲ 사진/지요하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웃고 말았습니다. 알았다고 하고선 며칠 동안 내용을 생각했다가 하루 전에 작업을 했습니다. 짓고 보니 A4 용지 한 장이 넘어버렸지만, 그래도 짧은 구절들로 이루어지고 여러 개 연들로 나누어진 운문이니, 산문처럼 이어 붙여서 적으면 A4 용지 1/2 안으로 들어올 것도 같더군요. 낭송을 잘하면 오히려 짧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고…. 

내용 때문에 고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님을 찬양하고 흠모하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에서 탈피하고 싶었습니다. 찬미보다는 참회와 절절한 기원을 표출하고 싶었습니다. 현실 문제들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를 짓고 또 여러 번 손질을 한 다음 ‘성모의 밤’ 행사에 참여하여 낭송을 하기 직전까지도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헌시를 들으며 다소 보수적인 것 같은 주임신부님은 어찌 생각하실까? 혹 반감을 갖는 신자들은 없을까? 또 나같이 환갑이 훌렁 넘어버린 사람이 시를 들고 앞에 나아가 낭송을 한다는 게 과연 어울리는 일일까? 젊은 사람이 시를 지어 낭송을 한다면 얼마나 보기 좋은 모습일까? 그런 생각들이 이상한 슬픔마저 안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낭송을 했습니다. 대성당 안을 메운 신자들 모두 숙연한 모습이었습니다. 내 시를 귀담아 들으면서 내용에 공감한 나머지 작게 탄성을 발하는 신자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모의 밤’ 전례가 끝난 후 내게 와서 악수를 청하는 이들도 있었지요. 

나는 내 신앙심과 양심의 작용 속에서 소신껏 헌시를 지었고, 또 절절한 마음으로 정성껏 성모 마리아님께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또 마땅히 해야 하는 내 몫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다시 그런 마음을 추스르며 여기에 그 시를 소개합니다. 

  
▲ 초와 꽃 봉헌.신자들은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한 손에는 꽃송이를 들었다. 촛불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꽃송이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모두 두 줄로 행렬을 지어 차례로 제대 앞으로 나아가 예수님과 성모님께 촛불과 꽃송이를 드렸다.(사진/지요하)

어머니, 죄송합니다 

해마다 5월이면 
풍만한 녹음과 갖가지 꽃들의 향연 속에서 
어머니께 찬미와 공경을 드리는 
‘성모의 밤’ 행사를 지내며 
올해는 더욱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어머니께 찬미와 공경을 드리는 일이 
그저 면구스럽기만 합니다 
어머님께 떳떳이 드릴만한 것이 없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서해바다의 거센 풍랑 속에서 
우리 한국교회를 성모 마리아님께 봉헌한 이후 
한국교회의 모든 성당들 앞에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성모님 공경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일이지만 
사실은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참담한 상황입니다 
저출산율과 이혼율과 자살율은 세계 1위를 달리고 있고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과 불법은 기본이 되어 있으며 
사회 전반의 가치관 혼돈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국민 대다수는 
다른 것은 다 죽어도 경제만 살면 된다는 
미혹에 빠져 살았고,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위정자들은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등진 채 
남북관계를 험악하게 만들며 전쟁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으시고 나서 “보시니 좋았다”하신 자연을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어 파괴와 훼손을 자행하면서 
바벨탑을 쌓아가는 사람들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입니다 

생각할 줄 아는 국민 
하늘 우러르며 사는 국민들을 만들어 내기 위한 
교육철학은 실종된 채 
교육현장에서는 오늘도 실용만을 외치며 
미래 세대들을 온통 경쟁으로만 몰아가고 있습니다 
대다수 아이들이 동시 한 편 외울 여유조차 잃은 채 
영어만을 외우고 
자연과 벗하기보다는 방안에 틀어박혀 
마구 죽이고 부수는 일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문화가 날로 극대화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찬란한 외양을 갖추고 
성모님께 찬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머니,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오늘밤 저희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어머니 앞에서 참회하게 하소서 
어머니께 무엇을 드려야 할지 고민하게 하소서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저의 삶이 
사회공동선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소서 

5월의 신록 속에서 
어머니께 찬양의 노래와 꽃다발을 드리는 
이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밤에 
저로 하여금 
속빈 강정과 빛 좋은 개살구를 면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과 절절한 열의, 
지혜와 통찰의 눈을 갖게 하소서 

어머니, 부족하고 죄 많은 저를 
일깨워주시고 도와주소서! 
참회의 눈물 안고 
엎드려 간청 드리옵니다! 

지요하 / 막시모, 소설가, 대전교구 태안성당 신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by Paul | 2011/06/06 21:14 | murmur│중얼거림 | 트랙백 | 덧글(0)

a paragraph to think over together-

  In acting as he did, Jesus was attacking the existing practice that had been set up by the Temple aristocracy, but he was not violating the Law and the Prophets─on the contrary: he was implementing the true law, Israel's divine law, in opposition to a custom that had become deeply corrupt and had become "law". Only this can explain the failure to intervene on the part of either the Temple police or the Roman cohort that stood ready in the castle Antonia. The Temple authorities merely asked Jesus by what authority he acted in this way.

_ Ratzinger, Joseph, Jesus of Nazareth, vol. 2, tr. by Philip J. Whitmore, SF, Ignatius Press, 2011, p. 12

by Paul | 2011/05/07 00:49 | 트랙백 | 덧글(0)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아프다, 무지.

by Paul | 2011/04/24 14:00 | 트랙백 | 덧글(0)

Romans 8: 35, 38-39

τίς ἡμᾶς χωρίσει ἀπὸ τῆς ἀγάπης τοῦ Χριστοῦ . . . πέπεισμαι γὰρ ὅτι οὔτε θάνατος οὔτε ζωὴ οὔτε ἄγγελοι οὔτε ἀρχαὶ οὔτε ἐνεστῶτα οὔτε μέλλοντα οὔτε δυνάμεις οὔτε ὕψωμα οὔτε βάθος οὔτε τις κτίσις ἑτέρα δυνήσεται ἡμᾶς χωρίσαι ἀπὸ τῆς ἀγάπης τοῦ θεοῦ τῆ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τῷ κυρίῳ ἡμῶν. _Greek New Testament

quis nos separabit a caritate Christi . . . certus sum enim quia neque mors neque vita neque angeli neque principatus neque instantia neque futura neque fortitudines neque altitudo neque profundum neque creatura alia poterit nos separare a caritate Dei quae est in Christo Iesu Domino nostro _Biblia Sacra Vulgata

Qui nous sépara de l'amour du Christ? . . . Oui, j'en ai l'assurance, ni mort ni vie, ni anges ni principautés, ni présent ni avenir, ni puissances, ni hauteur ni profondeur, ni aucune autre créature ne pourra nous séparer de l'amour de Dieu manifesté dans le Christ Jésus notre Seigneur. _La Bible de Jérusalem

Qui nous séparera de l'amour du Christ? . . . Oui, j'en ai l'assurance: ni la mort ni la vie, ni les anges ni les dominations, ni les forces des hauteurs ni celles des profondeurs, ni aucune autre créature, rien ne pourra nous séparer de l'amour de Dieu manifesté en Jésus Christ, notre Seigneur. _Traduction Oecuménique de la Bible(TOB)

Nothing therefore can come between us and the love of Christ . . . For I am certain of this: neither death nor life, no angel, no prince, nothing that exists, nothing still to come, not any power, or height or depth, nor any created thing, can ever come between us and the love of God made visible in Christ Jesus our Lord. _The Jerusalem Bible

What will separate us from the love Christ?  . . .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or angel, nor principalities, nor present thing, nor future things, nor powers, nor height, nor depth, nor any other creature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in Jesus Christ our Lord. _New American Bible

Who, then, can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 . . For I am certain that nothing can separate us from his love: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other heavenly rulers or power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either the world above nor the world below─there is nothing in all creation that will ever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God which is ours through Christ Jesus our Lord. _Good News Bible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 .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_성경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겠습니까? . . . 사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나 생명도, 천사들이나 주천사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능천사들이나 높이나 깊이도, 다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이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_200주년 신약 성서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 .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_공동번역 성서

by Paul | 2011/04/16 22:31 | 트랙백 | 덧글(0)

-

무어라도 주절대지 않으면
무어라도 하고있지 않으면
무어라도 엉겨대지 않으면

그러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심장이.

by Paul | 2011/04/08 20:46 | murmur│중얼거림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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