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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 2011/12/31 23:59 | sans titre│무제 | 트랙백 | 덧글(0)

여는 글

이상이 내가 이글루라는 생경한 곳에 블로그라는 새 둥지를 튼 이유이다.
나는 이곳에서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지 않다.
(물론 누군가 나의 글에 동의해주고 말을 걸어온다면 고맙긴 할 테지만.)
그저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적어놓는 노트(cahier)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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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 2011/12/31 23:58 | quotidien│일상 | 트랙백 | 덧글(6)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표상을 이용한 교리교수 연구

2011학년도 2학기

학문방법론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표상 연구

: C. S. 루이스의 『나르니아 연대기』를 중심으로


(A) Study on Christian Symbols in Literature

: Focusing on The Chronicles of Narnia by C. S. Lewis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  학  과


200911032 이  종  원

1.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신화인 동시에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강생은 ‘완전한 신화인 동시에 완전한 사실’이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다른 신화들과는 달리 실제로 일어난 진실한 신화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분명 본시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신화이다.1) 그렇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의 경우 그리스도교 문화, 특히 성경의 표징이나 모티프를 이용한 작품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된 사상으로 자리잡고 ‘이성중심주의’에서 ‘감성적 경험중심주의’로, ‘자율성중심주의’에서 ‘자기중심주의’로, ‘지식-원리중심주의’에서 ‘다원주의-상대주의’로 가치관이 변화하면서2) 그리스도교의 진리성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공격해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성경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C. S. 루이스(C. S. Lewis)의 『나르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를 통하여 인류의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과 선과 악의 세계, 그리고 과학과 이성에 대한 불안과 한계를 느끼는 현대인들이 열망하는 초월적인 세계인 ‘나르니아’를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하여 성경적 함의와 상징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2. C. S. 루이스의 생애와 저작


 2.1. C. S. 루이스의 생애


  C. S. 루이스는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공부했고, 또한 그곳에서 약 30년간 영문학을 강의했다. 말년에는 케임브리지에서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루이스는 ‘회의론자들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신화를 주제로 J. R. R. 톨킨(J. R. R. Tolkien)과 대화를 나누면서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톨킨은 신화와 그리스도교 복음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루이스를 그리스도교 신자로 인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2.2. C. S. Lewis의 저작


  영문학 연구에 큰 기여를 한 학자였던 루이스는 『나르니아 연대기』, 『침묵의 별 탈주』(Out of the Silent Planet)를 비롯한 우주 소설 3부작 등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판타지와 과학소설(SF)을 쓴 작가였으며,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스크루테이프 편지』(The Screwtape Letters) 등의 그리스도교 변증서를 집필하였다.

  특히 루이스는 톨킨과 함께 판타지 문학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데, 따라서 판타지 문학에는 이 두 사람이 정립한 몇 가지 관습이 존재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험을 떠나다’로 시작해 ‘집으로 돌아오다’로 귀결되며 『나르니아 연대기』의 ‘나르니아 왕국’ 혹은 『반지의 제왕』의 ‘중간계’처럼 인간들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영역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기저에 깔고 있다. 또한 신화적 영역의 존재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갖가지 마법들이 텍스트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세계관의 기본 질서는, 앞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로 명료하게 정리된다.


3. C. S. Lewis의 『나르니아 연대기』와 그리스도교적 표상


 3.1. 『나르니아 연대기』


  『나르니아 연대기』는 「마법사의 조카」(The Magician’s Nephew),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말하는 말과 소년」(The Horse and His Boy), 「카스피안 왕자」(Prince Caspian), 「동녘호의 모험」(The Voyage of the Dawn Treader), 「은의자」(The Silver Chair), 「최후의 대결」(The Last Battle) 등 7권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4) 각각의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동일한 인물이 여러 작품에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연대기’라는 단어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나르니아 연대기』는 나르니아 왕국이 창조되고 종말에 이르는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책은 바로 이 기간에 있었던 일들의 기록이다.


 3.2. 『나르니아 연대기』에 드러난 그리스도교적 특성


  루이스는 톨킨의 말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진정한 신화임을, 다시 말해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신화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신화라고 이해했다. 이로써 루이스는 이교 신화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이해함과 동시에, 비인격적인 하느님을 믿는 데서 강생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옮겨갔다.5) 이렇듯 판타지 문학의 선구자격이자 바이블로 일컬어지는 『나르니아 연대기』는 공교롭게도 판타지와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나르니아 연대기』는 노골적인 종교적 함의로 넘쳐나고 있다. 판타지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선과 악의 대결을 통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전통에 따른 영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교리에 근간을 둔 이런 식의 대결구도는 ‘악은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설파하며,6) 나르니아와 같이 실존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강력한 믿음은 사후 세계와 신의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특히 판타지 문학 속에서 고난을 받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승리하는 영웅의 존재는 필연적인데, 이는 예수에 대한 강력한 은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3.3. 『나르니아 연대기』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표상


  3.3.1.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표상

  루이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성경적 은유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중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무엇보다도 사자 아슬란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7) 이 작품은 디고리 커크라는 노교수의 집에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커크 교수의 집에 있는 옷장을 통해 나르니아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나르니아는 흰 마녀의 통치 아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8) 말하는 동물들은 아담의 아들과 하와의 딸9)에 관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예언이 성취되어 아슬란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네 아이들이 나르니아로 온 것은 바로 이 예언을 따른 것이었고, 곧이어 아슬란이 돌아와 마녀와 전투가 벌어져 나르니아에 평화가 돌아오는 듯이 보였지만 흰 마녀의 주문에 걸려들어 자신의 자만심과 이기심, 욕심과 욕망에 져서 배신자가 된 에드먼드를 구하기 위해 아슬란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던 그 때, 아슬란의 태초 이전부터 내려오는 더욱 강한 마법에 따라 부활하고, 전쟁은 아슬란이 이끄는 나르니아 군대의 승리로 끝난다. 이후 나르니아는 캐프 바라벨 성에 있는 네 개의 왕좌를 차지한 네 아이들의 통치를 받으며 번영을 누리고, 어느 날 아이들은 홀연히 사라져 우리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아슬란이 아담의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결심한 후 보여주는 일련의 모습들은 예수가 붙잡혔던 날 밤,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까지의 성경 속 서술을 거의 정확하게 되풀이해낸다.10)

  특히 부활에 대한 부분은 장소에 관련한 세심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복제’하고 나선다. 수잔과 루시는 마녀의 칼에 목숨을 잃은 아슬람의 시신이 있는 바위 탁자로 간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슬란은 그곳에 없었다. 아이들은 울부짖는다. “누가 그랬을까? 어떻게 된 셈이지? 또 다른 마법일까”11) 그 때 등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또 다른 마법이란다!”12) 아슬란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아슬란은 태초의 심오한 마법보다 더욱 심오한 태초 이전의 마법에 대하여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준다.

“마녀는 강한 마법을 알고 있지만, 실은 마녀가 모르는 더욱 강한 마법이 있단다. 마녀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태초까지밖에는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마녀가 태초 이전의 정적과 어둠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그곳에는 다른 마법의 주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배신 행위를 범하지 않은 자가 배신자를 대신하여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의 제물로 바칠 경우에는, 바위 탁자가 깨어지고 죽음 자체가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희생자는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마녀는 모르고 있단다.”1)


  이렇듯 부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예수를 따르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십자가에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고(요한 19,38-42), 아슬란이 죽어 있는 바위 탁자로 가는 수잔과 루시처럼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사서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해가 뜨자 무덤으로 가는 장면(마르 16,1-2)과, 없어진 아슬란의 시신을 보고 울부짖는 아이들처럼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울면서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다 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 서계셨다(요한 20,10-16)는 성경 속의 은유를 찾아 볼 수 있다.13) 이 외에도 에드먼드의 행동은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를 연상시키며, 아슬란의 최후와 부활을 함께하는 수잔과 루시는 종종 막달라 마리아처럼 비쳐진다.


  3.3.2. 「카스피안 왕자」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표상

  「카스피안 왕자」또한 다양한 성경적 상징과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나르니아가 텔마인들에게 지배받고 있던 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텔마인들은 우리 세계 해적들의 후손으로, 나르니아를 지배한 후 말하는 동물들을 쫓아내고 옛 나르니아의 역사를 신화나 전설 속의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들의 눈을 피해 숲속 깊숙한 곳에서 숨어 지내는 옛 나르니아의 백성들은 예언에 있는 대로 나르니아에 번영을 가져왔던 네 왕이 귀환하여 나르니아를 평화롭고 행복 가득한 나라로 되돌려 줄 것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옛 나르니아의 백성들 가운데 배신자가 생겨나고, 아슬란에 대한 믿음 역시 점점 퇴색되어 간다. 바로 이때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나르니아로 오게 된다. 이제 텔마인들과 옛 나르니아 백성들 간에 전투가 벌어진다. 미라즈 왕의 조카인 카스피안 왕자도 나르니아 편에 서게 되는데, 옛 나르니아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미라즈 왕에게 아들이 생기면서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터였다. 전쟁은 나르니아의 승리로 끝나고 옛 나르니아의 백성은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와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이야기 역시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의 억압과 구원의 경험과 구약과 신약 사이에 거의 400여 년간의 하느님의 침묵과 메시아의 기다림, 초대교회의 시기에 박해받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연상시킨다.14)

  이러한 모습은 구약의 2역대 34장의 유다의 어린 왕 요시야와 작품 속의 카스피안 왕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시야는 조상들의 사악함과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유다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에만 전념한다.15) 요시야 왕은 어린 나이에 하느님을 찾기 시작한다. 요시야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따라 걸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통치 제팔년에, 그는 아직 어린 몸으로 조상 다윗의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였다. 또 제십이년에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과 조각 신상과 주조신상들을 치우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하기 시작하였다”(2역대 34,2-3). 요시야 왕은 성전을 수리하고 제사장들의 직위를 회복시키며 율법서를 다시 발견한다. 또 33절에서 “요시야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속한 모든 지역에서 역겨운 것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 저희 하느님을 섬기게 하였다. 그래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사람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따르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카스피안 왕자가 나르니아를 회복시키려면 먼저 왕위를 빼앗은 악한 삼촌 미라즈 왕과 싸워야 한다. 카스피안은 나르니아 국민들을 한데 모아 텔마 군대를 격퇴하기 위해 머리를 짜낸다. 하지만 텔마 군대에 비해 수적으로 너무 열세라는 것을 깨달은 카스피안은 수잔 여왕의 뿔나팔을 불어 도움을 요청한다. 이로 인해 곧 페번시가의 아이들과 아슬란이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나르니아에 나타난다.16)

  로마 5,3-5의 내용처럼 피터, 에드먼드, 수잔, 루시는 나르니아에서 두 번째 모험을 하며 용기를 기르게 된다. 루시는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알게 되며(마태 16,24), 루시와 수잔의 모습은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를 연상시킨다(루카 10,38-42). 즉 루시가 아슬란의 발치에서 그의 말을 듣는 반면 수잔은 이것저것 염려하느라 정작 아슬란과는 시간을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카스피안 왕자」에는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라든지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라는 구절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3.3.3. 그 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표상

  루이스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마법사의 조카」는 창조와 악의 기원을,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그리고 있으며, 연대기의 마지막 작품인 「최후의 대결」은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세상의 종말, 마지막 심판을 드러내고 있다.


4. 나가는 말


  성경은 단순히 신학적인 명제나 교리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지와 이야기가 가득 담긴 책이다. 하느님은 이미지와 이야기 양식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영국의 판타지 작가인 존 호우튼(John Houghton)은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이유 중 많은 경우가 이야기하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 기인”17)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활용하여 그리스도교를 소개하고 변증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가장 좋은 예를 루이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루이스는 관념을 난삽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이미지와 예화를 적절히 사용하여 쉽고 담백하면서도 동시에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표현하면서 판타지와 같이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양식이 영적 실재를 다루는 데 적합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현대 판타지 문학의 규범적 작가인 톨킨은 경험적 세계를 제1세계(primary world)와 이야기꾼이 만든 제2세계(secondary world)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야기꾼에 의해 창조된 제2세계는 경험적 세계의 질서가 아닌 작품 내적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톨킨은 제2세계는 독자에게 ‘압도적 기이함’의 느낌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하며, 제1세계의 낡은 실존에서 ‘탈출’하고 감춰져 있던 진실 혹은 리얼리티를 통해 ‘위안’을 체험하고 경험적 삶의 신선함을 회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8)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오직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가 영화, 게임, 드라마에 넘쳐나면서 하느님 나라와 같은 영적 실재와의 연관성은 점점 줄어드는 현실 속에 살고 있기에, 그리스도인이라도 상상의 세계에 관해 말하는 것을 낯설어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 루이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나르니아 연대기』를 통하여 영적 세계의 한 실체로서 하느님 나라를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나르니아로 설명되는 상상의 세계도 다른 허구적 상상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비실재라고 인식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르니아를 통해 우리 사회 속에 하느님 나라를 새로이 설명해 나갈 힘을 살려가야 한다.


























▪참  고  문  헌▪


1. 성경

『성경』,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05


2. 단행본

David C. Downing, The Most Reluctant Convert: C. S. Lewis's Journey to Faith,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2

Ditchfield, Christin(크리스틴 디치필드), 『나니아 연대기가 읽어주는 성경: C. S. 루이스의 원작 소설에 숨겨진 성경 이야기』, 김의경 옮김, 서울: 크림슨, 2005

Ford, Paul F., Companion to Narnia, New York, NY: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31986

Lewis, C. S.(C. S. 루이스), 『시편 사색』, 이종태 옮김, 서울: 홍성사, 2004

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자와 마녀와 옷장」, 『나르니아 연대기』, 전경자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1

_________________________, 「카스피안 왕자」, 『나르니아 연대기』, 전경자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8

Lindskoog, Kathryn Ann(캐스린 린즈쿡), 『나니아 연대기의 거의 모든 것=Narnia: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만나는 C. S. 루이스의 세계』, 김의경 옮김, 서울: 크림슨, 2005

Houghton John(존 호우튼), 『해리포터를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송태현 옮김, 서울: 라이트하우스, 2004

Tolkien, J. R. R., The Tolkien Reader, New York, NY: Ballantine Book, 1966, p. 37

김도일·장신근, 『기독교 영성 교육』, 서울: 도서출판동연, 2009


3. 정기간행물

황치복, 「판타지 문학의 성서적 함의와 풍유: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문학과 종교』 제13권 제3호(2008), 한국문학과종교학회


4. 학위논문

백보람, 『C. S. 루이스의 영성에 근거한 기독교 교육의 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1


1) C. S. Lewis(C. S. 루이스), 『시편 사색』, 이종태 옮김, 서울: 홍성사, 2004, 151쪽.

2) 김도일·장신근, 『기독교 영성 교육』, 서울: 도서출판동연, 2009, 26-30쪽.

3) David C. Downing, The Most Reluctant Convert: C. S. Lewis's Journey to Faith,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2, pp. 13-18.

4) 시리즈 중에서「사자와 마녀와 옷장」이 제일 먼저 집필·출판되었지만, 완결된 뒤 사건 전개에 따른 시간순으로 재배열하여 지금의 순서로 읽히고 있다.(참조: Paul F. Ford, Companion to Narnia, New York, NY: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31986, p. 451)

5) 백보람, 『C. S. 루이스의 영성에 근거한 기독교 교육의 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1, 44쪽.

6) 황치복, 「판타지 문학의 성서적 함의와 풍유: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문학과 종교』 제13권 제3호(2008), 한국문학과종교학회, 7쪽.

7) Kathryn Ann Lindskoog(캐스린 린즈쿡), 『나니아 연대기의 거의 모든 것=Narnia: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만나는 C. S. 루이스의 세계』, 김의경 옮김, 서울: 크림슨, 2005, 42쪽.

8) 황치복, 앞의 책, 9쪽.

9) 루이스는 작품 속에서 인간이라는 말을 ‘아담의 아들, 하와의 딸(son of Adam, daughter of Eve)’이라는 표현과 교차 사용하고 있다. 아슬란은 이 표현을 네 아이들을 지칭할 때에만 사용한다(참조: Ford, Paul F., op.cit., p. 388).

10) Christin Ditchfield(크리스틴 디치필드), 『나니아 연대기가 읽어주는 성경: C. S. 루이스의 원작 소설에 숨겨진 성경 이야기』, 김의경 옮김, 서울: 크림슨, 2005. 63쪽.

11) C. S. Lewis, 「사자와 마녀와 옷장」, 『나르니아 연대기』, 전경자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1, 132쪽.

12) 같은 책, 132쪽.

13) Christin Ditchfield, 앞의 책, 97쪽.

14) 같은 책, 149쪽.

15) 황치복, 앞의 책, 12쪽.

16) C. S. Lewis(C. S. 루이스), 「카스피안 왕자」, 『나르니아 연대기』, 전경자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8, 88-96쪽.

17) John Houghton(존 호우튼), 『해리포터를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송태현 옮김, 서울: 라이트하우스, 2004, 64쪽.

18) J. R. R. Tolkien, The Tolkien Reader, New York, NY: Ballantine Book, 1966, p. 37


by Paul | 2011/12/03 10:26 | marié│신랑 | 트랙백 | 덧글(0)

지요하, 「어머니 이 나라가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2011. 06. 11.

"어머니, 이 나라가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시대를 고민하며 <성모의 밤>에 시를 읊다
2011년 06월 01일 (수) 20:00:34지요하  jiyoha@naver.com

어느덧 5월이 가버렸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5월 캘린더를 떼어내면서 이상한 ‘이별 체감’ 같은 것을 맛보았습니다. 6월 캘린더를 보면서는 30일 후에는 2011년도 절반이 꺾어지겠구나! 공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의 빠름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서 위안도 얻게 되니,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말해 요즘은 내 나이와 상관없이 세월의 걸음을 재촉하는 심정입니다. 

이제 633일 남았나요. 카운트다운이 진행 중인데요, MB의 잔여 임기를 초 단위까지 알려주는 시계화면을 보노라면 참 흥미롭습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초침이, 숫자들의 율동이 마치 힘찬 군무(群舞)처럼 보이기도 하고, 내 심장 박동과 호흡을 잘 이끌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 대성당 앞 마당에 모여 성모상 앞에서의 예절을 마치고 성당 입장을 기다리는 신자들. (사진/지요하)

천주교 신자인 제가 적을 두고 있는 대전교구 태안성당에서는 어제(5월 31일) 저녁 ‘성모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전 세계 모든 가톨릭 성당들이 5월 중에 ‘성모의 밤’ 행사를 갖는데, 5월 마지막 날에 행사를 갖는 성당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 태안성당도 올해는 5월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날 밤에 행사를 가졌는데, 지난해는 29일(토) 저녁에 행사가 있었습니다. 같은 날 공주 공산성 안의 불교사찰 영은사에서는 4대종단(천주교‧불교‧원불교‧개신교)과 대전충남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하는 4대강 공사 저지를 위한 ‘금강 지키기’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심을 해야 했지요. 고심 끝에, 성당 ‘성모의 밤’ 행사는 해마다 갖는 행사이고, 공주 공산성 영은사 ‘금강 지키기’ 행사는 너무도 절박한 일이라서 결국 아내와 함께 공주행을 단행했지요. 

우리 본당에는 또 한 분의 시인이 계신데요. 그 시인이 지난해 ‘성모의 밤’ 헌시 낭송을 담당하게 돼서, 저는 좀 더 수월하게 공주 영은사 행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성모의 밤’ 헌시 낭송이 제 담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시인과 제가 우리 본당 ‘성모의 밤’ 헌시 낭송을 겨끔내기로 담당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성모의 밤’ 헌시를 또 한 편 짓게 되었습니다. 

조금 섭섭한 일도 있었습니다. 내게 ‘성모의 밤’ 헌시를 부탁하신 본당 사목협의회의 간부 되는 분이 재미있는 말씀을 했습니다. 주임신부님의 강론이 너무 길어서 신자들이 ‘성모의 밤’ 행사를 전체적으로 지루해할 수도 있으니 헌시를 짧게 지어달라는 부탁이었지요. A4 용지 1/2 정도로 지어달라는, 분량 제시까지 하더군요. 

편지 형식의 산문을 짓는 것도 아니고 운문을 짓는 것인데 A4 용지 2/1 정도라니 어이없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운문에 대한 무지의 일단이기도 할 것 같고, 헌시 낭송을 요식의 하나로만 간주하는 태도일 것도 같고…. 

  
▲ 사진/지요하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웃고 말았습니다. 알았다고 하고선 며칠 동안 내용을 생각했다가 하루 전에 작업을 했습니다. 짓고 보니 A4 용지 한 장이 넘어버렸지만, 그래도 짧은 구절들로 이루어지고 여러 개 연들로 나누어진 운문이니, 산문처럼 이어 붙여서 적으면 A4 용지 1/2 안으로 들어올 것도 같더군요. 낭송을 잘하면 오히려 짧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고…. 

내용 때문에 고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님을 찬양하고 흠모하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에서 탈피하고 싶었습니다. 찬미보다는 참회와 절절한 기원을 표출하고 싶었습니다. 현실 문제들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를 짓고 또 여러 번 손질을 한 다음 ‘성모의 밤’ 행사에 참여하여 낭송을 하기 직전까지도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헌시를 들으며 다소 보수적인 것 같은 주임신부님은 어찌 생각하실까? 혹 반감을 갖는 신자들은 없을까? 또 나같이 환갑이 훌렁 넘어버린 사람이 시를 들고 앞에 나아가 낭송을 한다는 게 과연 어울리는 일일까? 젊은 사람이 시를 지어 낭송을 한다면 얼마나 보기 좋은 모습일까? 그런 생각들이 이상한 슬픔마저 안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낭송을 했습니다. 대성당 안을 메운 신자들 모두 숙연한 모습이었습니다. 내 시를 귀담아 들으면서 내용에 공감한 나머지 작게 탄성을 발하는 신자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모의 밤’ 전례가 끝난 후 내게 와서 악수를 청하는 이들도 있었지요. 

나는 내 신앙심과 양심의 작용 속에서 소신껏 헌시를 지었고, 또 절절한 마음으로 정성껏 성모 마리아님께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또 마땅히 해야 하는 내 몫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다시 그런 마음을 추스르며 여기에 그 시를 소개합니다. 

  
▲ 초와 꽃 봉헌.신자들은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한 손에는 꽃송이를 들었다. 촛불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꽃송이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모두 두 줄로 행렬을 지어 차례로 제대 앞으로 나아가 예수님과 성모님께 촛불과 꽃송이를 드렸다.(사진/지요하)

어머니, 죄송합니다 

해마다 5월이면 
풍만한 녹음과 갖가지 꽃들의 향연 속에서 
어머니께 찬미와 공경을 드리는 
‘성모의 밤’ 행사를 지내며 
올해는 더욱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어머니께 찬미와 공경을 드리는 일이 
그저 면구스럽기만 합니다 
어머님께 떳떳이 드릴만한 것이 없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서해바다의 거센 풍랑 속에서 
우리 한국교회를 성모 마리아님께 봉헌한 이후 
한국교회의 모든 성당들 앞에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성모님 공경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일이지만 
사실은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참담한 상황입니다 
저출산율과 이혼율과 자살율은 세계 1위를 달리고 있고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과 불법은 기본이 되어 있으며 
사회 전반의 가치관 혼돈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국민 대다수는 
다른 것은 다 죽어도 경제만 살면 된다는 
미혹에 빠져 살았고,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위정자들은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등진 채 
남북관계를 험악하게 만들며 전쟁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으시고 나서 “보시니 좋았다”하신 자연을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어 파괴와 훼손을 자행하면서 
바벨탑을 쌓아가는 사람들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입니다 

생각할 줄 아는 국민 
하늘 우러르며 사는 국민들을 만들어 내기 위한 
교육철학은 실종된 채 
교육현장에서는 오늘도 실용만을 외치며 
미래 세대들을 온통 경쟁으로만 몰아가고 있습니다 
대다수 아이들이 동시 한 편 외울 여유조차 잃은 채 
영어만을 외우고 
자연과 벗하기보다는 방안에 틀어박혀 
마구 죽이고 부수는 일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문화가 날로 극대화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찬란한 외양을 갖추고 
성모님께 찬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머니,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오늘밤 저희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어머니 앞에서 참회하게 하소서 
어머니께 무엇을 드려야 할지 고민하게 하소서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저의 삶이 
사회공동선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소서 

5월의 신록 속에서 
어머니께 찬양의 노래와 꽃다발을 드리는 
이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밤에 
저로 하여금 
속빈 강정과 빛 좋은 개살구를 면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과 절절한 열의, 
지혜와 통찰의 눈을 갖게 하소서 

어머니, 부족하고 죄 많은 저를 
일깨워주시고 도와주소서! 
참회의 눈물 안고 
엎드려 간청 드리옵니다! 

지요하 / 막시모, 소설가, 대전교구 태안성당 신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by Paul | 2011/06/06 21:14 | murmur│중얼거림 | 트랙백 | 덧글(0)

a paragraph to think over together-

  In acting as he did, Jesus was attacking the existing practice that had been set up by the Temple aristocracy, but he was not violating the Law and the Prophets─on the contrary: he was implementing the true law, Israel's divine law, in opposition to a custom that had become deeply corrupt and had become "law". Only this can explain the failure to intervene on the part of either the Temple police or the Roman cohort that stood ready in the castle Antonia. The Temple authorities merely asked Jesus by what authority he acted in this way.

_ Ratzinger, Joseph, Jesus of Nazareth, vol. 2, tr. by Philip J. Whitmore, SF, Ignatius Press, 2011, p. 12

by Paul | 2011/05/07 00:49 | 트랙백 | 덧글(0)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아프다, 무지.

by Paul | 2011/04/24 14:00 | 트랙백 | 덧글(0)

Romans 8: 35, 38-39

τίς ἡμᾶς χωρίσει ἀπὸ τῆς ἀγάπης τοῦ Χριστοῦ . . . πέπεισμαι γὰρ ὅτι οὔτε θάνατος οὔτε ζωὴ οὔτε ἄγγελοι οὔτε ἀρχαὶ οὔτε ἐνεστῶτα οὔτε μέλλοντα οὔτε δυνάμεις οὔτε ὕψωμα οὔτε βάθος οὔτε τις κτίσις ἑτέρα δυνήσεται ἡμᾶς χωρίσαι ἀπὸ τῆς ἀγάπης τοῦ θεοῦ τῆ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τῷ κυρίῳ ἡμῶν. _Greek New Testament

quis nos separabit a caritate Christi . . . certus sum enim quia neque mors neque vita neque angeli neque principatus neque instantia neque futura neque fortitudines neque altitudo neque profundum neque creatura alia poterit nos separare a caritate Dei quae est in Christo Iesu Domino nostro _Biblia Sacra Vulgata

Qui nous sépara de l'amour du Christ? . . . Oui, j'en ai l'assurance, ni mort ni vie, ni anges ni principautés, ni présent ni avenir, ni puissances, ni hauteur ni profondeur, ni aucune autre créature ne pourra nous séparer de l'amour de Dieu manifesté dans le Christ Jésus notre Seigneur. _La Bible de Jérusalem

Qui nous séparera de l'amour du Christ? . . . Oui, j'en ai l'assurance: ni la mort ni la vie, ni les anges ni les dominations, ni les forces des hauteurs ni celles des profondeurs, ni aucune autre créature, rien ne pourra nous séparer de l'amour de Dieu manifesté en Jésus Christ, notre Seigneur. _Traduction Oecuménique de la Bible(TOB)

Nothing therefore can come between us and the love of Christ . . . For I am certain of this: neither death nor life, no angel, no prince, nothing that exists, nothing still to come, not any power, or height or depth, nor any created thing, can ever come between us and the love of God made visible in Christ Jesus our Lord. _The Jerusalem Bible

What will separate us from the love Christ?  . . .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or angel, nor principalities, nor present thing, nor future things, nor powers, nor height, nor depth, nor any other creature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in Jesus Christ our Lord. _New American Bible

Who, then, can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 . . For I am certain that nothing can separate us from his love: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other heavenly rulers or power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either the world above nor the world below─there is nothing in all creation that will ever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God which is ours through Christ Jesus our Lord. _Good News Bible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 .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_성경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겠습니까? . . . 사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나 생명도, 천사들이나 주천사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능천사들이나 높이나 깊이도, 다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이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_200주년 신약 성서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 .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_공동번역 성서

by Paul | 2011/04/16 22:31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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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도 주절대지 않으면
무어라도 하고있지 않으면
무어라도 엉겨대지 않으면

그러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심장이.

by Paul | 2011/04/08 20:46 | murmur│중얼거림 | 트랙백 | 덧글(0)

전경자, 맑고 깊으신 박완서 선생님, 『현대문학』2011년 3월호(통권 675호)

맑고 깊으신 박완서 선생님

전경자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예요?” 처음 뵙던 날 거두절미하고 던지신 질문이셨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하고 김유정이라고 말씀드리자, “나하구 같네”라고 하셨지요. 돌이켜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하고 김유정이라는 이름이 툭 튀어나온 덕분에 그로부터 15년이 넘게 당신 주변에서 얼쩡거릴 수 있는 특권을 얻은 셈이었으니까요.


  그날, 그 첫날, 당신을 뵙고자 한 까닭을 들으시며 지으셨던 그 표정, 좀 어이없어하시면서도 조금은 재미있어하셨던 그 표정,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연극하고 싶은데, 그것도 모노드라마로 하고 싶은데 대본 좀 써달라니, 실은 조금이 아니라 무척 어이없으셨을 겁니다.


  그 후 당신을 뵐 때마다 하나 써주십사고 사뭇 앵벌이 수준으로 수년 동안 졸라댔더랬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날따라 무슨 구국운동에나 나선 듯이 핏대를 올리면서, 지네 나라 말 우습게 여기는 나라가 나라냐, 영언지 뭔지가 지금 이 나라 망치고 있으니 필히 그걸 주제로 쓰셔야 한다, 어쩌고저쩌고 횡설수설하자, 생각나세요? “그냥 당신이 쓰지 그래.” 그러시더라고요. 지금이야 고백하건데, 다시는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하시는 한 말씀치고는 일품이었습니다.


  그랬다고 연극 얘기가 어디 거기서 끝났던가요. 내가 연극에 출연하니 표 좀 많이 사주십사고, 한 장에 2만 원인데 출연자인 나한테서 사시면 한 장에 만 원이라 여러 장 사실수록 그만큼 더 득을 보시는 셈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꼴을 말갛게 보시더니 100장 사주셨죠. “이거 내 아는 사람들한테 줄 건데, 나 창피하지 않게 잘이나 해.” 일침 없이 표만 듬뿍 사주실 분이 아니시죠, 당신은.


  하기야 일침 맞은 게 한두 번이었나요. 우리 애들한테 남의 말 가르치느니 남의 애들한테 우리 말 가르치는 게 무릇 일다운 일이라고 기염을 토하면서, 밖에 나가 실제로 몇 년 그렇게 했지요.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생각이 들었는데, 이 뒤늦게 든 생각이 꽤 그럴듯해서 당신한테 으스대려고 (성질 더럽게 급한 거 어디 가나요?) 당장 수화기를 집어 들고 고했죠.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누구를 가르치느냐가 얼마나 더 중요한 건지 깨달았어요!” 이어 들려오는 차분하신 당신 음성, “그걸 인제 알았어?”


  인사동 어느 다방에서 있었던 일, 잊지 않으셨죠? 혹시 시도 읽으시냐고 여쭤보았더니 어쭙잖은 질문에 어처구니없어하시면서도 답은 주셨지요. 시 좋아하신다고, 댁에 시집도 많이 있으시다고. 그러시느냐고, 그러시면 한 번 들어보시라면서 후르르 읊어댔더니, 음악 소리는 높고 내 소리는 낮아서, 다시 해보라 하셨고, 다시 들으시더니 적고 싶어하셨고, 적어드렸더니 찬찬히 훑으시고 나서, 당신 책이 곧 나오는데 거기다 싣고 싶다시며,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물으셨죠. 그때 “싫습니다”라고 했어야 멋있는 사람 되는 건데 멋없는 사람이 멋있어지는 게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이겠습니까. 난 펄쩍 뛰었지요, 좋아서. 나, 한심한 정도가 그렇고, 그게 내 됨됨이고, 그게 내 그릇임을 훤히 아시면서도 그런 나를 늘 받자해주셨던 까닭이 무엇인지, 옘~병, 이제는 알아낼 도리가 여~엉 없게 되었습니다.


  볼티모어 할렘가. 조각 닭 튀겨 팔면서 살아가는 어느 중년 부부. 그 집 아들 말이 고달픈 일상에서도 박완서 소설만은 손에서 놓지 않는 자기 어머니가 십수 년 만에 한국에 잠깐 들른다기에, 당신한테 우리 집에 오셔서 그 양반이랑 식사 한 번 해주십사고 청한 적이 있었지요. 그 여인네분, 식사 내내 당신 얼굴 한 번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더니 식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아예 등을 돌리고 부엌으로 가서 막무가내로 설거지를 했지요. 나중에 아들한테 들으니, 당신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벅차고 가슴 떨려서 그리했다 하더이다.


  먹는 얘기가 나오니 당신 댁에서 받았던 밥상이 떠오르네요. 두 차례나 차려주셨던 걸 보면 내가 측은지심깨나 불러일으켜드렸나 봅니다. 어쨌거나 그 당시에는 특별히 고맙다는 생각 전혀 없었습니다. 두 번째 들렀을 때였지요. “나, 아무나 집에 오라구 해서 밥해주지 않아.” “나두 밥 준다구 해서 아무 집이나 가서 먹지 않아요.” 생각의 속도를 뛰어넘고 튀어나온 싸가지 없는 내 응수에 “아이구, 고맙습니다, 이렇게 와서 잡숴주셔서.”라고 되받아주시면서 까르르까르르…… 맑고 고운 소리 내는 구슬이 구르면 그런 소리가 나겠지요.


  멀고머언 그 옛날, 1998년. 겨울바다나 보라시며 제주도에 데리고 가주셨지요. 그리하여 주신 당신 깊은 속내 사무치게 고마웠건만 어쩌자고 그 흔해터진 “고맙습니다” 소리 한 번 안 했는지……. 아, 아, 지금 하면 너무 늦었나요? 아니, 지금 하겠습니다. 받아주시고 마시고는 당신 몫이고 나는 지금이라도 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바로 엊그제, 2010년 12월 13일. 그날 병원에 가셔야 해서 15일 점심약속을 취소해야 한다는 전화를 따님한테서 받고서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정신이나 육신이나 한결같이 철저하게 관리하시는 분이시잖습니까, 당신은. 그래, 밥이야 아무 때 먹으면 어떠랴 싶어 연말연시에 한가하게 밖에 좀 나가 있다가 돌아와서 또 며칠 보낸 후 이제쯤이면 시간 충분히 드렸다 싶기에 전화드렸더니 따님이 받았지요. 바로 그날 퇴원하셔서 방금 집에 돌아오셨다는 겁니다. 그동안 한 달이나 병원에 계셨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여하튼 이제 퇴원하셨다니까 반가웠지요. 입원한다면 뭐가 탈이 났다는 말이니까 뒤숭숭하지만 퇴원이란 말은 병원에서 나왔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퇴원하셨다는 말에 반가워하는 게 당연해야 하지 않습니까.


  쉬고 계시면 됐다고, 나중에 다시 전화드리마고 했더니 잠시 기다려보라고, 혹시 전화받으실 수 있으신지 알아보겠노라고…… 이윽고 들리는 “여 보 세 요……” 놀랍고 겁나고 무서웠습니다. 기운 좀 차리시면 그때 점심 먹자는, 뭐, 그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하고 계셨지만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고 듣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전화 끊으시라고, 기운 아끼시라고, 며칠 후 찾아뵙고 많이 웃겨드리겠다고……. 나도, 뭐, 그 비슷한 소리를 얼버무렸습니다. 그러고는 번역일 속으로 숨어버렸지요.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 약속은 항상 안심하고 믿을 수 있었으니까요.


  22일 토요일. 전화 몇 통 받았습니다. 신문도 안 보고 뉴스도 안 보고 인터넷도 안 하니까 모르고 지나칠까봐 일러준다나요. 하나도 고맙지 않았습니다. 참말이지 영안실 가기 싫었습니다.


  가실 때가 되셨으니 당신 뜻과 무관하게 가시게 되었겠지 아무려면 가시겠다 작정하고 가시기야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가셔야 얼마나 멀리 가셨겠습니까. 조만간 다시 뵐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가 계시겠지요. 그리 믿습니다. 그리 믿어야 내 마음이 좀 덜 허할 듯싶습니다.


  허나 떠나셨다는 것이 곧 보내드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부재를 절감하기에는 남겨놓고 가신 것이 너무도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나라에 문학이라는 것이 이어지고 있는 한, 당신의 존재는 이 나라 한가운데 자리하고 계십니다.


  좋은 사람은 한 번 보아도 또 보고 싶고 다시 보아도 또다시 보고 싶어지듯이 한 번 읽어 좋은 글은 다시 또 읽어도 좋습니다. 그리항 여기 잠시 남아 있는 우리야 좋은 당신 다시 못 뵙게 되어도 당신의 좋은 글 다시 또 읽을 수 있으니 황망히 길 떠나시랴 잔정 풀지 못하신 점 괘념치 마시고 평안히, 영원히 계시옵소서.


 

전경자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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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자 1945년 서울 출생. 성심여대 영문과 졸업. 미국 텍사스주립대에서 박사학위 받음. 시집 『아무리 아니라 하여도 혹시나 그리움 아닌가』. 한역서 『나르니아 연대기』(전7권) 등. 영역서 『태평천하』『회색인』 등. 연극 「감마선은 달무늬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등 출연. <한국문학번역상> 등 수상. 가톨릭대 영문과 교수, 하버드대 동아시아언어문명과 교수 역임. 현재 가톨릭대 명예교수.

 

by Paul | 2011/04/02 16:27 | 트랙백 | 덧글(0)

맘이 이상해

맘이 이상하다.
봄바람도 아니 부는데, 왜.

by Paul | 2011/03/29 20:52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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