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 1, 2학년 때 클럽 활동으로 고적답사반을 선택했던 덕에 광화문과 종로, 명동 일대를 종횡무진 쏘다닐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고양문화원 학술연구원으로 일하시는 분이 한 달에 두 번 우리를 서울 시내 곳곳에 숨어있는 역사 유적으로 안내해주셨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서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의 서울시청 구청사 역시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유인 즉 하늘에서 광화문 일대를 바라보면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인왕산이 큰 대大, 구 조선총독부 청사가 날 일日, 서울시청사가 근본 본本의 형상을 가지고 있어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전국 주요 산 정상에서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꽂아놓은 철심들이 다량 발견되면서 서울시청사 철거론은 더욱 더 거세졌다. 그러던 것이 잠잠하더니만 지금 청와대에 계시는 2MB님이 서울시장으로 계실 적에 신청사 건축 계획을 세우면서 청사를 부수자 말자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2MB님은 청와대로 가시고 오세훈 변호사가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청사를 새로 짓되 구청사는 보존하여 시민 공원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쪽으로 갈피를 잡았다. 그리고 2008년 8월 26일 오후 4시에 문화재위원회에서 근대문화유산분과·사적분과 합동회의를 통해 구청사를 사적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서울시와 합의하였다.

그런데 4시로 계획된 문화재위원회 합동회의 직전에 서울시가 구청사 뒷편 태평홀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문화재위원회와의 합의는 뒤로 한 채, 시에서 세운 계획대로 청사 건축을 진행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일을 벌인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 발생해버렸다. 문화재위원회 소속 위원들은 황당함을 뒤로 한 채 부랴부랴 회의를 열어 예외적으로 30분만에 구청사를 사적으로 지정해버렸다(보통 서너 시간이 기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건물은 부서져 버렸는 걸.
여튼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두고 대다수의 언론에서는 서울시를 공격하고 있다(관련 기사 1, 관련기사 2). 서로 협의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파기했으니 욕을 먹을 수 밖에. 게다가 '사적으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구청사를 개발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때려 부수었으니 더더욱 욕을 먹을 수 밖에. 그런데 웃음이 나는 부분은 바로 이거다. 십 몇 년 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할 때 민족 정신을 함양하는 의미로 서울시청도 같이 헐어야 한다고 외치던 언론들이 이제는 소중한 겨레의 재산 운운하며 오늘 사건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
하지만 모든 언론인이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가 보다. 지난 사십 여년간 서울의 도시 계획을 맡아온 김석철이란 양반은 구청사는 꼭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이유가 뭐냐고? 직접 클릭해서 보는 게 더 좋겠지만 글이 너무 길어 지금 당장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를 여러분을 위해 짧게 말하자면, 구청사의 위치가 조선시대 도시의 축이었던 광화문─종로의 축에서 벗어나 일제시대 조선 거주 일본인을 위해 새로이 조성한 을지로, 충무로, 태평로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민족혼을 담아내기엔 위치도, 건물도 너무나 조선스럽지(요즘 말로 하자면 한국적이지) 못하다는 것.
일개 무지렁이 시민인 내가, 게다가 서울시민도 아닌 내가 구청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찧고 빻는 것이 조금 우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시市의 살림집인 시청을 짓는 데에 충분한 구상과 상의와 토론 없이 이리 휙 저리 휙 널뛰는 모습은 매우 우습다. 자기 집 짓는 데에도 갖은 정성을 다 기울여 재고 따지고 검토하거늘, 수도의 새 시청사를 짓는 데에 정성이 부족하대서야 원. 또 이 사건이 오래된 것은 부수고 새로 다시 지어야 좋다는 1960년대식 무조건새것주의가 아직까지 공무원들 머리 속을 헤엄치고 다닌다는 반증은 아닌 건지.
서울시청 구청사가 원형으로 보존되든 마저 철거되든 어떻게 되든, 남으면 남는 대로 없어지면 없어지는 대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결국엔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그랬고, 미륵사지 석탑이 그랬듯이.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문화 유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인 셈이다.
Paul
# by | 2008/08/27 00:47 | murmur│중얼거림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